부끄러움의 깊이
부끄러움과 뻔뻔함은 얼마나 떨어져 있을까. 둘은 서로를 향해 어떤 얼굴을 보일까.어느 쪽에 서게 되든, 나는 화가 날 것 같다. 부끄러울 때 만나는 뻔뻔함에도 화가 나고, 뻔뻔해질 때 만나는 부끄러움에도 화가 나고.부끄러운 속을 드러내 놓는 일은 많은 용기를 갖고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잘못을 저지른 일, 잘못 생각한 일, 잘못 대처한 일 등등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에게는 물론이거니와 스스로에게도 가능하면 숨기고 싶어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걸 말이나 글로 나타내려면-노래나 그림이나 춤도 아니고-스스로에게 어지간한 자신감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어떤 비난을 받아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의 도량을 가진 사람으로서. 책은 무겁게 읽혔다. 이렇게 풀어 놓으시다니, 숨긴 채로는 견딜 수 없으셨던 모양이라고, 차라리 밖으로 내비치는 게 더 나으리라 믿고는 부끄럽지만 고백하겠다는 글을 읽고 있으려니 작가의 마음 일부가 전해 오면서 불편해지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이 잘못을 반성하는 모습을 통해 우리가 덩달아 반성하는 일도 얼마나 자주 겪는 일이었던가. 게다가 미처 반성하지 못했던 부분을 건드렸다 싶을 때는 씁쓸한 낭패감을 느끼게 되는 일도 있다. 내가 왜 아직 이러고 있는가, 나는 왜 좀 더 나아지지 못한 채로 머물러 있는가, 나는 괜찮아지고 있기는 한가...... 어느 시대를 건너게 되더라도 그 사람이 감당해야 할 몫이 있을 것이다. 능력이 넉넉하면 넉넉한 만큼, 능력이 모자라면 가지고 있는 만큼 발휘하면서 사회에 기여하기도 하고 사는 보람도 느끼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일 테다. 모르면 몰라서 못하고 사는 것이겠지만, 안다면 아는 만큼 깨달은 만큼 베풀고 참여하고 누려야 할 일이라고 머리로는 수없이 확인하는데 게으른 의지는 따르지 못할 때가 많다. 가끔 이런 책으로 마음을 깨우는 게 고작이다.
부끄러움이란 아물지 않는 상처를 지닌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아픈 표정이다.
부끄러움을 잊은 시대를 향한 낮고 단단한 성찰의 언어들!
1980년대 ‘민족문학주체논쟁’을 이끈 문학평론가, 1990년대 ‘주례사비평’과 2000년대 ‘표절문학’ 논란에서 비타협적인 태도를 견지한 비평가. 문학평론가이자 인하대 교수, 계간지 [황해문화] 편집주간인 김명인을 가리키는 수식어들이다. 이런 그가 글쓰기 인생 4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익숙한 평론집이 아닌, 인생과 시대를 되돌아보는 산문집을 펴냈다. 1990년대부터 블로그와 페이스북에 쓴 수백 편의 산문 가운데 70여 편을 엄선해 부끄러움의 깊이 라는 제목으로 책을 엮은 것이다.
생활글을 비롯해 책에 실린 자유로운 형식의 글들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부끄러움 과 성찰 이다. 작가는 글쓰기의 대상을 자기 안으로 가져와 성찰하고 솔직하게 드러내는 데 주저함이 없다. 지나온 삶을 회고하는 글뿐만 아니라, 신영복 선생을 추모하는 글, 신경숙 표절 사건을 비판하는 글, 메갈리아 논쟁에 관한 글들에서도 ‘나’는 삭제되지 않는다. 그리고 ‘나이듦, 자기정체성, 문학, 혁명, 페미니즘’ 등 작가의 심연을 통과한 대상들은 낮고 단단한 언어들을 만나 ‘부끄러움’이라는 새로운 ‘깊이’를 얻는다. 그렇다면 작가에게 부끄러움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아물지 않는 상처를 지닌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아픈 표정이다.
혁명가의 삶을 살고자 했으나 얼마 못 가 한갓 문필가의 삶이 왔고, 또 가난한 문필가의 삶조차 그대로 지키지 못하고 어정어정 대학교수의 길로 접어든 한 지식인의 회한과, 그래도 버릴 수 없는 희망을 만날 수 있다.
서문 부끄러운 이야기
1부 저기 낯선 남자 하나
이렇게 늙는다
틈
세월
남은 사람들
오십 년이 지났다
저기 낯선 남자 하나
빚진 자의 혼잣말 ? 전태일 단상
취직했습니다
나의 영원한 배후, 이원주 형의 영전에
명령이 부족한 밤
무모한 희망
억압적 희망, 습관적 절망
하나하나 다가온다
궁극의 희생
이 불편함에서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관념적 래디컬리즘에 대한 변명
나는 좌파다?
몽상의 인문학, 비현실의 사회과학
중독
모두가 귀족이 되는 세상
얼치기 페미니스트의 변명
그대 언 살이 터져 시가 빛날 때
비 온다
낮술
일몰
2부 슬픔의 문신
저건 내가 아니다
지친 낙타
지금 데려가 다오
개 같은 희망
떠도는 슬픈 넋의 노래
징벌의 시간
미안하다 영근아
부끄러움의 깊이
집에 가자
생의 진퇴유곡에서
강철로 만든 노래비 하나
고갈되어 가는 존재들
다시 노동문학
어떻게 계속할 것인가
반갑고, 고맙다
나 자신에게 승리한다는 것
꽃은 경계에서 피어난다
조지 오웰
그녀들에게
미야자키 하야오
또박또박 따라 적을 것
3부 우리는 인간인가
조국은 없다
말 새로 배우기
어떤 반성
메갈리아와 전복의 언어
진보를‘참칭’하는 자들
분노, 혐오, 그리고 짜증
불륜, 매춘, 그리고 윤리 도덕
헬조선
좌우에서 상하로
문학으로?
나는 지금 조증이다
꼭 문학이 아니라도 좋다
이시영 선생님께
문제는 계엄령이 아니다
누구를 믿을 수 있을까
우리는 인간인가
이 깃발 아래서
어떤 만시지탄
그날은 언제 오는가